밸포어 선언은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테러리스트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자세히 보기
밸포어 선언은 중동,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입니다. 1917년 11월 2일에 발표된 이 짧은 편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조국” 건설을 영국이 지지한다는 의미로 시온주의자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내졌습니다. [미국을 세계대전에 영국의 동맹국으로 끌어들이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국가 건설 승낙을 얻어냄]
하지만 이 문건과 그 여파에 대한 논란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밸포어 선언을 둘러싼 구체적인 내용과 그 파장, 그리고 그 해석과 실행을 둘러싼 논쟁을 짚어보겠습니다.
밸포어 선언: 문맥과 내용
밸포어 선언은 다양한 정치적, 역사적 발전의 결과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상황에서 영국 [유대 조직]은 국제 유대인 사회, 특히 러시아와 미국 유대인 사회의 지지를 얻어 자국 정부가 중앙 열강[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간의 동맹국]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박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영국의 대표적 유대인인 로스ㅊㅇㄷ 경에게 보낸 이 선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폐하의 정부 견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조국을 건설하는 것을 찬성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할 수 있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의도적으로 모호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조국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을 뿐, 이 조국의 매개변수나 건설 수단에 대해서는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파와 권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국제연맹은 영국에 팔레스타인 통치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이제 영국은 이 지역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의 상반된 민족주의적 열망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일련의 백서, 즉 정책 성명을 발표했지만, 긴장만 고조되었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까지 반유대주의 정책들과 유럽에서의 박해에 자극을 받아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들의 이민이 크게 증가했습니다.[위조 알리야를 위해 반유대주의를 조장한 사탄의 회당의 계략] 이는 때때로 아랍인 세입자들을 쫓아낸 강제 토지 구매와 함께 증가한 유대인들의 존재감으로 인해 고조된 긴장과 폭력적인 대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계약”과 시온주의자들의 위반 혐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밸포어 선언의 문구를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대량 이민과 유대인들이 다수인 국가의 설립이 이 약속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부 사람들은 시온주의자들이 “계약을 깼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계약’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밸포어 선언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라기보다는 의도를 담은 선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전쟁 기간과 이후에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학살당하고] 실향민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해 낙바(또는 “대재앙”)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의 피난을 초래했습니다.
‘테러리스트들’로서의 시온주의자들
“테러범”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나 정치적인 면이 강합니다. 국가 이전의 시기에, 이어건(Irgun)이나 스턴 갱(Stern Gang)과 같은 특정한 유대인 준군사조직들이 영국 관리들과 아랍인들 모두에게 폭력적이고 때로는 무차별적인 전술을 사용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행동은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어건 (에첼)
이어건(Irgun) 또는 에첼(Etzel)은 1931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활동했던 시온주의 준군사조직입니다. 아랍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념적 차이와 영국의 정책 때문에 주요 유대인 방어 조직인 하가나로부터 분리된 파벌로 형성되었습니다.
1.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1946): 이어건이 수행한 가장 악명 높은 행동들 중 하나는 영국 행정 본부가 있는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였습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영국인, 아랍인 및 유대인을 포함 9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어건은 건물을 대피하라는 경고를 주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2.데이르 야신 대학살 (1948): 또 다른 논란이 되는 사건은 이어건(Irgun)과 또 다른 극단주의 집단인 레히(Lehi)에 의해 공동으로 자행된 데이르 야신 마을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그 공격은 100명 이상의 아랍 마을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데이르 야신의 사건들은 심하게 논쟁되어 왔지만, 그 대학살로 전쟁 동안 그들의 집에서 대량 탈출한 팔레스타인 아랍 사람들에게 깊은 심리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레히(스턴 갱)
설립자인 아브라함 스턴의 이름을 따서 스턴 갱이라고도 불리는 레히는 또 다른 급진적인 시온주의 준군사조직이었습니다. 그들은 요르단 강 양쪽에 유대인 국가가 강력하게 설립되었다고 믿었고, 영국과 또한 그들이 유대인 국가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1.모인 경 암살 (1944): 레히(Lehi)에 의해 행해진 세간의 이목을 끄는 행동들 중 하나는 중동에 거주하는 영국 장관인 모인 경의 암살이었습니다. 그 단체는 그를 시온주의 대의의 적으로 여겼습니다.
2.베르나도트 백작 암살 (1948) 레히는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한 그의 제안이 유대 국가의 이익에 해롭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엔 중재자인 폴케 베르나도트 백작의 암살을 조직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스라엘 초대 총리인 데이비드 벤구리온[33도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주류 유대인 지도부[사탄의 회당]가 이들 극단주의 단체의 행동을 종종 비난했다는 점입니다[연막작전]. 새로 수립된 이스라엘 정부는 1948년 ‘알탈레나 사건(Altalena Affair)’으로 알려진 이어건(Irgun)에 대한 군사 작전까지 개시하며[프라파갠다], 폭력 사용과 새 국가에 대한 비전을 둘러싼 유대인 공동체 내의 깊은 분열을 반영했습니다.
출처: https://expose-news.com/2023/10/25/zionists-jews-turned-into-terrori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