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차바드 랍비 메이어 알파시(Meir Alfasi)는 북한 공산주의 정부의 첫 번째 차바드니크라고 불렸다.
빌 스트리퍼, 2022.12.14
이것은 러시아 유대인 가족의 이야기인데, 그들 중 두 명의 구성원이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명 북한이 되는 것의 형성에 역할을 했다.
북한의 첫 최고 지도자이자 현 지도자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은 1948년 북한 정부 수립과 1994년 여름 사망 사이에 공산주의 전체주의 독재를 이끌었다(이스라엘 건국년과 같은 해에 북한 정권이 수립된 것은 시온주의자들의 계획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500km 떨어진 러시아 바예보 마을(현재 벨라루스)의 연관성은 2009년 러시아 유대인 지노비 메클러가 ‘유대인 마을의 소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자신의 가계도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 드러났다. 불행히도 지노비는 어렸을 때 바예보를 떠났기 때문에 그의 대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노비는 1926년 바예보에서 태어났다. 어느 순간,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지노비와 그의 직계 가족들은 나중에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와 합류했다.
지노비의 할머니인 프루마 긴다와 할아버지인 나프톨리 잘마노비치도 바예보에 살았다. 나프톨리의 동생 호니아는 2명의 아들(보루와 그리샤)과 3명의 딸(피라, 디나, 루바)을 두었는데, 모두 전쟁 전에 바예보를 떠났다. 보루는 파일럿이 되었고, 피라는 야금가가 되었고, 외교관이 된 그리샤는 한국에서 일했다. 지노비는 “그(그리샤 메클러 외교관)의 참여로 김일성이 북한에서 선출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노비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육군 장교인 김일성을 “김일센” (러시아어로 “Kim Ir Sen”)이라고 불렀다.
메클러 씨족의 또 다른 일원인 소련의 “공보 비서관”인 그리고리 코노비치 메클러 대령은 “북한의 새 정부를 위한 기초를 닦았다”고 2002년에 그리고리 메클러를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던 러시아 칼럼니스트 미하일 란초프에 따르면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 당시 메클러는 러시아 연방의 명예 문화 종사자였으며,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동양 연구소 연구원 출신이었다. 메클러는 몇 년 후에 사망했다.
란초프는 메클러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기억력과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극동전선 정치부의 제7선전부장으로서 메클러는 “북한에서 새 정부를 위한 기초를 닦았다… 김일성 통치 초기의 사건들의 직접적인 참가자이자 목격자… 최고 지도자의 오른손이자 고문이었다.”고 란초프는 말했다.
지금은 기밀로 해제된 미군 기밀 보고서에 따르면 김일성이 1945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유능한 민족주의자이자 북한에서 가장 존경받는 비공산주의자인 조만식을 키워주었고, 조만식에게 자신이 열렬한 민족주의자이며 한국에 대한 공산주의 계획의 일부를 믿지 않는다고 사적으로 말했다고 한다.(3) 사실 하버드대 동아시아법학과 연구위원인 김정원에 따르면, 김일성의 전기는 그가 소련에서 훈련받으며 보낸 4년(1941~45년)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4)
일제의 항복에 따라 김일성이 소련 점령군과 함께 귀국한 지 75년이 지난 지금,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하나도 논쟁거리가 되지 않고 있다. 모든 전문가들은 북한의 미래 지도자가 1945년 9월 중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소련 육군 장교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고 믿지만, 그의 계급에 대해서는 아무도 동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한국과 세계의 한 기사는 김일성이 “대위나 소령의 계급을 가진 러시아 군복을 입고 북한에 들어갔다”고 말한다.(5)
러시아과학원 극동문제연구소 한국학센터장인 닥터 알렉산더 제빈에 따르면, “러시아 자료와 문서는 그가 대위였다고 한다.” 제빈은 1975년 소련 F부 국제관계연구소를 졸업한 러시아의 대북전문가로 북한에서 언론인과 외교관으로 12년을 보냈다.(7)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 소련 제25군평의회 소속이었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 소장(8)은 김 위원장이 소련군 대위라는 데 동의했다. 레베데프는 러시아 학술지 소베르셴노 세크레트노(Sovershenno sekretno)가 2011년에 발표한 1984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일성은 곧 우리에게 넘겨졌다. 나는 그가 소련군 대위의 제복을 입고 가슴에는 붉은 깃발 훈장을 달고 있었는데,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둥글고 두꺼운 그 한국인은 러시아어를 잘했지만 정치적 자질 면에서는 전혀 무지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시험에 완전히 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스탈린에게 가서 그의 후보자가 자격이 없다고 보고할 수가 없었다.”
비록 러시아인들은 김일성이 1945년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가 소련군 대위였다고 믿고 있지만, 현재 온라인판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9)을 포함한 다른 출판물들은 그가 소령이었다고 말한다. 미 상무부가 펴낸 198쪽 분량의 보고서 ‘북한 15년사’의 저자 김창선씨는 “김일성의 ‘소령 계급장’이 관측되었으므로 소련군에서 ‘임시 소령’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10).
저자는 1963년 ‘중국 계간지’에 실린 ‘북한 인민군과 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일성은 ‘스탈린 훈장’과 ‘홍군 소령 계급’을 받았다.(11) 마찬가지로 서울타임스(2009년)의 ‘김일성의 지도력을 단련시킨 소련’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일성은 소령으로 일컬어진다.
그리고리 메클러와의 인터뷰에 기반해서 서울타임스 기사는 1945년 소련군 소령 계급을 얻은 김일성이 [소련] 점령군을 이끌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12)
메클러를 비롯한 소련 고문들은 1년 동안 미래의 지도자와 함께 북한을 순회하며 “심지어 연설문 작성을 도왔다”며(13), 러시아 유대인 메클러가 김일성을 권력자로 몰아가는 데 도움을 줬지만 북한은 메클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그 기사는 얘기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이어 메클러는 국제적인 연구자, 언론인,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일련의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1997년, 러시아 TV 센터가 6월 14일 김일성에 관한 영화와 7월 15일 후계자 김정은에 관한 영화 두 편을 상영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북한 대사관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 영화의 내용과 출처를 문의했다. 이 영화들은 저널리스트 레오니드 멜레친의 작품이었다.(16)
멜레친은 김일성 관련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뒤 같은 인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며 2편을 상영하지 말라고 경고받았다고 했다. 멜레친은 “만약 그것이 방송에 나간다면, 당신은 영안실에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 남자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멜레친이 외무부에 항의한 후, 그와 그의 가족은 안전상의 이유로 집을 떠났다. 그들은 외교부 부장관이 멜레친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 대사에게 우려를 표명했다는 사실을 알린 후에야 일주일 후에 귀국했다. 멜레친 대변인은 “위협 전화가 끊겼다”고 말했다.
Notes:
1 http://shtetle.com/Shtetls/baevo/mekler_eng.html
2 Lamtsov, Mikhail. “The ‘Godfather’ Kim Jong Il,” the electronic version of Vladivostok (No. 1283, Dec. 20, 2002), a Russian newspaper.
3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General Staff, July 31, 1952, p. 90.
4 Kim, Joungwon A. “Pyongyang’s Search for Legitimacy,” Problems of Communism (January-April 1971), p. 5 in Perspective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 June 1971, p. 5; https://www.cia.gov/library/readingroom/docs/CIA-RDP79-01194A000300090001-4.pdf
5 Korea & World Affairs, Vol. 4, 1980, p. 168.
6 Alexander Zhebin to author (via e-mail) on Oct. 11, 2020.
7 “Dr. Alexander Zhebin,” Global Peace Foundation; http://www.globalpeace.org/people/dr-alexander-zhebin
8 General Lebedev wrote a chapter of a book (in Russian) titled “In the Name of Friendship with the Nation of Korea” (1965). The chapter title is “The Dawn of Freedom Over Korea.”
9 “Kim Il-Sung: President of North Korea,” Encyclopedia Britannica;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Kim-Il- Sung.
10 Kim, Chʻang-sun. “Fifteen-Year History of North Korea,” U.S. Department of Commerce, 1963, p. 28.
11 Chung, Kiwon.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and the Party,” The China Quarterly, No. 14 (Apr.-Jun., 1963), p. 106.
12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Seoul Times, Nov. 12, 2009; https://theseoultimes.com/ST/?url=/ST/db/read.php%3Fidx=1937.
13 Ibid.
14 “The Red Monarch” (Красный монарх) premiered on June 29, 1997.
15 “The Heir to the Throne” (Наследник престола), a sequel, was broadcast on July 6, 1997.
16 Medetsky, Anatoly.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The Moscow Times, July 22, 2004;http://oldtmt.vedomosti.ru/sitemap/free/2004/7/article/kim-il-sungs-soviet-image-maker/229454.html. 17 Ibid.
출처: https://fitzinfo.net/2022/12/14/the-russian-jews-who-helped-create-north-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