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 의정서 5-4
게다가, 고임(이방인들)이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교묘하게 조작된 이론과 상투적인 표현을 통해 대중과 개인을 조종하는 기술은 우리의 행정 두뇌의 전문가들에게 속한다. 분석, 관찰, 치밀한 계산의 진수에서 기른 이 기술로 인해 정치적 행동과 연대의 계획을 짜는 데 있어 우리를 능가할 경쟁 상대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예수회만이 우리와 비교됐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동안 우리 스스로 우리의 비밀 조직을 그늘에 감춘 반면, 생각 없는 군중들의 눈에는 그들을 공공연한 조직으로 불명예스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카톨릭의 우두머리든 시온의 피를 가진 우리의 전제군주든, 누가 주권자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선택된 민족에게, 그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우리 유대인들만이 세상을 지배한다).
최초의 예수회(제수잇 Jesuit)는 크립토 유대인이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자신은 오컬트 카발라의 크립토 유대인이었다.
크립토 유대인은 비밀리에 유대교 관습을 유지하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종교로 개종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유대인이다.
1491년에 산 이그나시오 드 로욜라는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들은 개종자들이였고 그가 태어났을 때 그 가족은 매우 부유했다.
젊었을 때 그는 스페인에 있는 유대인 일루미나티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그의 크립토 유대인 운동을 감추기 위해 매우 활동적인 로마 카톨릭교도가 되었다.
1521년 5월 20일, 이그나티우스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반불구가 되었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성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성결을 위한 탐구를 시작했고 결국 파리로 가서 사제직을 위해 공부하게 된다.
1539년에 크립토 유대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로마로 이주하여 “예수회”를 설립했는데,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장 비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핍박을 가하는 질서가 되었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예수회를 승인했다.
1556년 로욜라가 사망했을 때 예수회에는 여러 나라에 위치해 있는 1,000명 이상의 회원이 있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비서 폴랑코는 유대계 혈통이었으며, 유일하게 로욜라의 임종시에 함께 한 사람이었다.
로욜라의 뒤를 이어 제2대 예수회 장군이 된 제임스 라이네즈도 유대인 혈통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회 교단에 끌렸고 많은 수가 가입했다.
라쿤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그것이 그가 왜 밀레니엄 기간 동안의 유대인 동물 제사로 돌아가는 종말론적 가르침을 도입했는지 설명해준다.
(“영광과 위엄으로 오는 메시아”라는 제목의 책은 작가가 죽은지 11년 후인 1812년에 출판되었다. 이마누엘 드 라쿤자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개신교 독자들의 입맛에 맞도록 하기 위해, 개종한 것으로 알려진 유대인 랍비 후안 요사파트 벤 에즈라의 필명으로 글을 썼다. 그는 요한계시록의 예언 성취를 세상 끝으로 제한하는 미래지향적 관점을 개발한 16세기 예수회 사제 프란시스코 리베라의 글을 홍보했다.)
라쿤자는 또한 환난 후 천년 동안 유대인들의 동물 희생제사가 카톨릭의 성체(대량)와 함께 복원될 것이라고 썼다.
라쿤자는 유대인들의 우화를 따랐고,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의 계명으로 대체했다.
그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이 땅의 천년왕국에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우선권을 주고 기독교인들을 유대인들에 의해 대체될 예언적인 괄호로 강등시킨다.
출처: https://israelect.com/reference/WillieMartin/Ignatius_Loyola.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