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퀴글리의 제한된 수다방, 비극과 희망
캐롤 퀴글리(Carroll Quigley)는 세계를 지배하는 과두 정치인들의 작전 무기에 대한 문서 증거에 접근할 수 있는 내부자였습니다. 그는 1966년에 쓴 ‘비극과 희망: 우리 시대의 세계사(Tragedy and Hope: A History of the World in Our Time)’라는 제목의 책에 자신의 발견을 썼습니다. 퀴글리는 조지타운 대학교의 교수였습니다. 1992년 7월 16일 빌 클린턴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클린턴은 퀴글리를 조지타운 대학교 재학 시절 자신에게 영향력 있는 멘토로 묘사했습니다.
퀴글리는 그가 쓴 세계 과두 정치인들의 목표에 대한 진정한 신봉자였습니다. 그 과두 정치가들은 유대인들이었고, 퀴글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퀴글리는 그 어둠의 힘이 자신을 “쓸모 있는 바보(useful idiot,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어젠다를 위해 자발적으로 속고 이용당하는 비유대인을 일컫는 말)”로 여긴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퀴글리는 그의 주인들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무지한 광신도였습니다. 퀴글리는 “나는 그들의 목적 대부분에 대해 아무런 혐오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내 생애의 많은 기간 동안 그들과 그들의 많은 기구들과 가까이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그 주된 목표란 완전한 세계 정복을 가리킵니다. 퀴글리는 무대 뒤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이 강력한 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목표를 비밀로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퀴글리는 “일반적으로 그들과 나의 주된 의견 차이는, 그들은 그들의 정체와 목표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를 원하지만, 나는 인류 역사에서 그들과 그들의 목표가 하는 역할 때문에, 알려져야 할 만큼 충분히 중요하다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퀴글리는 내부자이기 때문에 이 자들이 실제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는 이 단체에 대한 자신의 연구와 저술이 “제한된 수다방”이 될 것이며, 단지 몇 가지만 밝히고 가장 중요한 것, 즉 세계 음모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감추기 위해 고안되어야 함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그의 책 전반에 걸쳐서 세상 공모자들을 언급할 때 속임수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을 “국제 친영파 네트워크”로 일부러 잘못 묘사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할지는 몰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아니라고 거짓 주장을 했습니다.
1974년 워싱턴 포스트의 루디 맥사(Rudy Maxa)와의 인터뷰에서 퀴글리는 보수적인 반공산주의 작가 W. 클리온 스카우젠(W. Cleon Skousen)이 쓴 책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퀴글리는 스카우젠이 자신의 저작권을 침해했고, 퀴글리가 《비극과 희망》에서 쓴 글을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퀴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그에 대해 쓰고 있는 단체는 원래 1908년과 1909년에 밀너 경이 비밀리에 설립한 원탁 그룹이라는 단체였는데, 이 단체는 1910년 이래 세계 최고의 국제 관계 정보 출처들 중 하나인 런던에서 ‘원탁회의’라는 계간지를 발행하고 있다.”
퀴글리는 비밀스런 원탁 모임을 넘어서려는 모든 질문들을 차단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구축했습니다. 그 원탁회의들(외교관계위원회와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은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신세계질서를 위한 그들의 세계적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세운 전선 그룹들일 뿐이었습니다. 퀴글리는 스카우젠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커튼 뒤에서 원탁회의들에 자금을 대고 통제하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윌리엄 F. 재스퍼(William F. Jasper)는 2001년 8월 13일자 뉴 어메리칸(New American) 매거진에 실린 ‘대통령직 배후의 힘(The Power Behind the Presidency)’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외교관계위원회가 여러 원탁회의들 중 하나라고 설명했습니다. 외교관계위원회는 회원들을 세뇌시키는 데 사용되며, 이들은 미국 ㅈㅂ에 침투하여 통제합니다. 체스터 워드(Chester Ward) 제독은 16년 동안 외교관계위원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외교관계위원회의 목표가 미국을 무장해제시켜서 전능한 세계ㅈㅂ에 넘겨주는 것임을 깨닫고 외교관계위원회에서 사임했습니다.
프리츠 스프링마이어는 《일루미나티의 혈통》에서 뉴욕에 본부를 둔 외교관계위원회와 런던에 본부를 둔 왕립국제문제연구소를 포함하되 이에 국한되지 않는 원탁회의 그룹들이 로스ㅊㅇㄷ 유대인 은행 제국의 에드먼드 드 로스ㅊㅇㄷ와 그의 계열사들, 그리고 다른 강력한 유대인 은행가들에 의해 자금 지원을 받고 설립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는 뉴욕에 본사를 둔 외교관계위원회를 설립하고 초기에 이끌었던 로스ㅊㅇㄷ 대리인이었습니다. 외교관계위원회의 최초 자금은 로스ㅊㅇㄷ 에이전트들인 유대인 은행가 J.P. 모건, 유대인 금융가 버나드 바룩, 유대인 은행가 오토 칸, 유대인 은행가 제이콥 쉬프, 그리고 외교관계위원회의 초대 이사회에 있던 유대인 은행가 폴 워버그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퀴글리는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책 ‘비극과 희망‘에서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에 2000만 달러(오늘날 돈으로 10억 달러 이상)를 지원한 제이콥 쉬프는 퀴글리의 저서 ‘비극과 희망‘에서 단 한 번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퀴글리는 워버그 유대인 은행가를 딱 한 번 언급하고, 그 다음에는 한 유대인 은행가라고만 언급했을 뿐입니다. 폴 워버그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총재였지만, 퀴글리는 전혀 폴 워버그를 지목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외교관계위원회의 창립에 관여한 것 외에도 로스ㅊㅇㄷ의 대리인인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측근 고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는 우드로 윌슨이 연방준비제도법에 서명하는 것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하우스는 윌슨에게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회에 청원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런데도 퀴글리는 그의 책에서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는 뉴욕에 본사를 둔 외교관계위원회를 설립하고 초기에 이끌었던 로스ㅊㅇㄷ 대리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가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1923년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캐롤 퀴글리는 그의 저서 ‘비극과 희망: 우리 시대의 세계사‘에서 하우스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퀴글리는 왜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와 같은 중추적인 인물에 대한 모든 언급을 배제했을까요? 왜냐하면 만약 퀴글리가 하우스를 외교관계위원회의 창립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게임을 포기하는 것이 되고 외교관계위원회의 시온주의 핵심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랍비 스티븐 와이즈(Stephen Wise)의 인용문만 읽어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랍비 스티븐 와이즈는 1920년 미국 유대인 의회를 설립하고 1936년 미국 시온주의 기구의 회장이 된 영향력 있는 시온주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랍비 와이즈와 또 다른 시온주의 유대인인 루이스 브랜다이스(Louis Brandeis)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설득하여 밸포어 선언을 지지하도록 했습니다.
랍비 와이즈는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가 우드로 윌슨 행정부에서 시온주의 유대인들을 위해 물을 길어 왔다고 밝혔습니다. 랍비 와이즈에 따르면,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는 우리의 대의를 그의 매우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윌슨 행정부와 시온주의 운동 사이의 연락 장교 역할을 했다.” 더글라스 리드, 시온의 논쟁, 166-67쪽.
윌슨 대통령은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의 꼭두각시, 아니 그의 분신이 되었습니다. 더글러스 리드는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는 윌슨 대통령이 당선된 후 그의 서신을 인수했고, 대통령이 누구를 만나야 할지 혹은 받아들지 말아야 할지를 정하고, 내각 관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등을 지시했다”고 설명합니다. 윌슨 대통령은 시온주의 통제자들의 손에 맡겨졌는데, 그들 중 우두머리가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였습니다. 실제로, 윌슨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통제는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벤자민 프리드먼은 윌슨을 가리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무능한 갓난아기였다”고 묘사했습니다. 더글러스 리드는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는 미국의 국가 정책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시오니즘, 세계 혁명의 지지, 세계ㅈㅂ의 야망을 촉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은밀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강력한 시온주의 은행가들의 이익을 위해 미국 정책을 이끌기 위해 우드로 윌슨에 대한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의 영향력이 드러난 것은 퀴글리의 시온주의 조련사들이 숨길 필요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퀴글리의 임무는 세계주의 음모를 시온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이게끔 떼어놓는 것이었습니다. 퀴글리가 원탁 모임의 자금 조달과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플레이어들을 20년 동안 그 그룹에 대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한 책에서 제외시킨 것은 의도적이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퀴글리는 원탁회의 단체들의 선동적인 활동들 뒤에 있는 유대인들의 자금과 공산주의 철학을 감추려 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루디 맥사와의 인터뷰에서, 퀴글리는 맥사에게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퀴글리가 말하길, “이봐. 당신은 분리되어 있어야 해 … 내 미래를 보호해야 한다는 걸 알잖아… 당신 자신의 것도 마찬가지고.” 맥사는 퀴글리의 충고에 동의했습니다. 퀴글리는 자신이 녹음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대답은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는 맥사가 자신의 질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퀴글리의 임무는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는 것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는 그가 루디 맥사와의 인터뷰에서 한 기괴한 발언이었습니다. 퀴글리는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한 어떤 음모론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은 역사의 거대한 범위를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 음모를 폭로합니다! 왜 그는 20년간의 연구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책의 주장과 명백히 반대되는 진술을 했을까요? 그는 ‘비극과 희망’에서 자신의 임무가 유대인들의 음모를 은폐하는 것이지 모든 음모를 은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자기의 모든 길에서 안정이 없느니라.” (야고보서 1:8)
퀴글리가 역사의 음모론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직후, 질문자인 루디 맥사는 “국제 은행 음모”를 거론했습니다. 맥사는 “만약 내가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국제 은행 음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패배한 것이 아니며, 단지 어떤 관심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퀴글리가 질문자의 말에 대답하기 시작하자 녹음이 갑자기 끝나서 그 주제에 대한 퀴글리의 발언은 기념될 수 없었습니다.
왜 강력한 시온주의 유대인들은 퀴글리가 그들의 전선 조직과 음모에 대해 글을 쓰도록 허락했을까요? 원칙에 따르자면, 세계 음모에 대한 유대 본성이 드러나고 대중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엘리트들은 그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 내부자였던 벤자민 프리드먼은 세계 지배를 위한 시온주의자들의 계획을 폭로하고 있었습니다. 소문이 퍼져나갔고, 세계 공산주의 음모에 대한 책임은 국제 은행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 엘리트들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했습니다. 캐롤 퀴글리는 세계 지배를 위한 사악한 계획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성을 확립하되,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을 가해자들로부터 분리해 “국제 친영파 네트워크”에 올려놓았습니다.
캐롤 퀴글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모든 당사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를 제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참전을 조장함으로써 국제 유대인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등을 찔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비극과 희망, 255쪽. 퀴글리의 거짓 주장은 벤자민 프리드먼의 주장을 처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분명합니다. 프리드먼이 설명했듯이,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고 독일이 제시한 유리한 평화 조건으로 끝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하도록 주선하겠다는 강력한 국제 유대인들의 막후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렇게 하였으며, 영국으로부터 밸포어 선언의 형태로 그들의 보상인 팔레스타인에 조국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실제로, 입증 가능한 역사적 사실은 밸포어 선언의 조건이 강력한 유대인 은행가인 월터 로스ㅊㅇㄷ 경(후에 영국 유대인 대표 위원회의 회장이 됨)에 의해 영국 ㅈㅂ에 지시되었다는 것입니다.
밸포어 선언은 영국 외무장관 아서 제임스 밸포어가 월터 로스ㅊㅇㄷ 경에게 “유대인을 위한 국가적 고향”을 설립하고 영국 ㅈㅂ가 로스ㅊㅇㄷ 경의 지시에 따라 그 목적을 촉진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밸포어 선언에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보호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조항은 로스ㅊㅇㄷ 경이 규정한 것이 아닙니다.
영국 외무부
1917년 11월 2일친애하는 로스ㅊㅇㄷ 경,
나는 당신에게 전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국왕 폐하의 ㅈㅂ를 대표하여,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에 동조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내각에 제출하고 승인하였습니다.
폐하의 ㅈㅂ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적 거주지를 설립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 목적의 달성을 촉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팔레스타인에 존재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의 유대인들이 향유하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합니다.
이 선언문을 시온주의 연맹에 알려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신의
아서 제임스 밸포어
밸포어 선언
퀴글리의 책이 출판되자, 유대인 공산주의 계층은 처음에 이 책이 국제적 음모들을 꾸미는 권력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정체가 감추어진 제한된 아지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기민한 연구자들이 베일을 뚫고 점들을 연결하고, 배후의 강력한 유대인 공작원들을 찾아내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퀴글리의 단순한 주장들을 넘어서 누가 있어서는 안 되는 진짜 세력인지 알아내기까지 그리 많은 조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퀴글리는 세계 지배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너무 구체적이었습니다. 그 지식은 자유롭게 유통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자, 퀴글리의 책이 더 이상 출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대중의 요구가 매우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맥밀런 출판사는 즉시 그 책의 인쇄를 중단했습니다. 인쇄소는 퀴글리와 맺은 계약을 어기고 그 책의 원래 인쇄판을 파괴했습니다. 일부 기업 정신을 가진 자들은 한 내부자가 세상에 제시하는 그 책에 담긴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책을 재출판했습니다.
퀴글리는 자신의 책에서 어떤 진실들을 마치 신화와 우화에 불과한 것처럼 교묘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신화와 우화가 실제로 사실임을 밝히곤 했습니다. 이제 그는 바로 나서서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신화가 “약간의 진실”(윙크-윙크)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는 고안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퀴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존 T. 플린(John T. Flynn), 프레다 우틀리(Freda Utley) 등이 쓴 이 사건들에 대한 급진적 우파 해석은 1947년에서 1955년 사이에 미국의 여론과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부덴츠나 벤틀리의 해석보다 훨씬 더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급진적 우익 동화는 현재 미국의 많은 그룹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민속 신화이며, 국내 개혁과 외교 문제에 관한 미국의 최근 역사를 백악관 자체에서 활동하고 미국의 모든 주요 홍보 수단을 통제하는 극우 세력에 의해 잘 조직된 음모로 묘사했다. 사기업, 자유방임주의, 고립주의에 기초한 미국적 생활방식을 파괴하고, 러시아 사회주의와 영국의 세계주의(또는 국제주의)라는 이질적인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 이 음모는, 우리가 그 신화를 믿는다면, 뉴욕 타임즈와 헤럴드 트리뷴,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와 워싱턴 포스트, 애틀랜틱 만슬리와 하퍼스 매거진과 같은 홍보 수단들을 통해 작동했고, 그 핵심에는 사회주의 하버드와 런던 정경대학의 거친 눈과 덥수룩한 머리의 이론가들이 있었다. 미국은 영국(루즈벨트의 첫사랑)과 소비에트 러시아(루즈벨트의 두 번째 사랑)의 편에 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미국인 생활의 모든 미세한 요소들을 파괴하고, 이 의식적으로 계획된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을 초청하여 진주만을 공격하고 장개석을 파괴하는 한편, 과도한 지출과 불균형한 예산으로 미국의 진정한 힘을 약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신화는 모든 우화가 그렇듯이 사실 어느 정도 진실을 가지고 있다. 급진적 우파가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을 어느 정도 믿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국제적 친영국 네트워크[사탄의 회당]가 존재하고 한 세대 동안 존재해 왔다. 사실, 우리가 원탁 모임이라고 부르는 이 네트워크는 공산주의자들이나 다른 어떤 그룹과도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자주 그렇게 한다. 나는 20년 동안 이 네트워크를 연구해 왔으며 1960년대 초에 2년 동안 그 문서와 비밀 기록을 조사하도록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이 네트워크의 운영에 대해 알고 있다. 나는 그 네트워크나 그것의 목표 대부분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내 인생의 많은 시간 동안 그것과 그것의 많은 도구들과 가까이 지냈다. 나는 과거와 최근에, 그것의 몇 가지 정책(특히, 영국은 유럽의 강대국이라기보다는 대서양의 일부이고, 미국과 동맹을 맺거나 심지어 연방을 맺어야 하며, 유럽으로부터 고립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그 네트워크의 신념)에 반대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과 나의 주된 의견 차이는, 그들이 그 네트워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나는 인류의 역사에서 그것이 하는 역할 때문에 세상에 알려져야 할 만큼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비극과 희망, 950.
퀴글리의 책에서 밝혀진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신세계질서 음모의 배후에 있는 자들의 최종 단계를 설명하며, 그 최종 단계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중앙은행을 통제하는 것은 오직 유대인 국제 은행들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퀴글리가 묘사한 세계 헤게모니라는 기념비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퀴글리는 “금융 자본주의의 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강력한 국제 유대인 은행 회사들을 묘사합니다.
퀴글리는 그들의 목표가 “각 나라의 정치 체제와 세계 전체의 경제를 지배할 수 있는 개인들의 손에 있는 세계 금융 통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유대인 은행가들은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그것을 그들이 위에서 아래로 통제하는 사회주의 세계 체제로 대체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ㅋㅂㄷ-19 거짓 전염병의 실제 내용입니다. 세계 지배권을 차지하려는 이 사탄의 음모는 여러 세기 동안 진행되어 왔습니다. 퀴글리가 1966년에 ‘비극과 희망’을 출간한 것을 상기해 보십시오. 퀴글리는 「비극과 희망」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금융자본주의의 힘은 또 다른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각 나라의 정치 체제와 세계 경제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사적 소유의 세계 금융 통제 시스템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체제는 세계의 중앙은행들이 공동으로 행동하는 봉건주의적 방식으로, 빈번한 사적 회의들과 회의에서 도출된 비밀 협정들에 의해 통제되게 되어 있다. 이 제도의 축은 스위스 바젤에 있는 국제결제은행인데, 이 은행은 그 자체로 사기업들인 세계 중앙은행들이 소유하고 통제하는 민간은행이다. 영국은행의 몬태규 노먼,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벤자민 스트롱, 프랑스은행의 샤를 리스트, 독일은행의 얄마르 샤흐트와 같은 사람들의 손에 있는 각 중앙은행은 국고를 통제하고, 외환을 조작하고, 국가들의 경제 활동 수준에 영향을 미치고, 사업 세계에서 경제적 보상을 통해 협력적인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ㅈㅂ들을 지배하려고 했다. – 비극과 희망, 324쪽.
학식 있는 학자들이 퀴글리의 책을 해부하여 세계를 지배하려는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밝혀냈을 때, 퀴글리는 나서서 그러한 개념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1974년 루디 맥사(Rudy Maxa)와의 인터뷰에서 캐롤 퀴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파는 이 사람들이 공산주의 동조자들이고, 세계 지배를 지지하며, 반자본주의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과 다른 많은 것들을 파괴하기 원합니다. 그들은 캐롤 퀴글리가 모든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그룹이 볼셰비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취지로 끊임없이 내 말을 잘못 인용합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있는 집단이 볼셰비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증거를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에 있는 것의 한 가지 예를 들자면요.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편지를 써서 ‘이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학생들이었습니다.
퀴글리는 약간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유대인들의 헤게모니,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음모의 폭로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책에서 자료를 발췌한 몇몇 책들은, 비록 유대인 계급을 공공연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민한 독자라면 미국 경제, ㅈㅂ 및 기타 기관들의 전복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루디 맥사와의 인터뷰 중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퀴글리: “그리고 그들은 이 책[‘아무도 감히 그것을 음모라고 부르지 않는다’]을 월 스트리트, 은행가들, 유대인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논쟁으로 사용하는 반유대주의자들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와 연락이 닿았던 그 친구, 그 대학의 교수였던 그 친구와 토론하기를 원했습니다.”
맥사: “누가 이걸 믿겠습니까?”
퀴글리: “어. 아뇨, 그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없애려고 애썼습니다. 브리검 영에서 제게 전화를 걸었던 그 친구가 그 산악 지역을 휩쓸고 있는 히스테리를 멈추려고 애썼던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퀴글리가 무엇을 밝히고 있는지를 이해하십시오. 이 논쟁은 유대인 공산주의 음모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려는 반대자들과 함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논쟁의 요점은 금융 기관을 운영하는 강력한 유대인들이 미국을 전복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을 묻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퀴글리가 믿을만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토론의 양측은 실제 플레이어들이 누군지 고려할 수 없는 한, 대중이 알 수 있는 공정한 게임으로 간주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만 토론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토론은 음모를 인정하되 대중의 관심을 실제 공모자들로부터 돌리기 위한 제한된 수다방이었습니다. 토론자들은 음모의 범위와 침투에 대해서만 토론할 뿐이고, 그것이 다였습니다.
그들은 대중이 무지한 청중이기를 바라야 했습니다. 또 다른 내부자인 벤자민 프리드먼(Benjamin Freedman)이 이미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세계 공산주의 음모의 핵심인 것을 폭로했기 때문에 정보에 입각한 청중은 이 사기를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프리드먼의 계시는 유대인 계급으로 하여금 캐롤 퀴글리가 그의 책에서 사실들에 대한 제한된 행아웃 제시를 허용하도록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연설: 벤자민 프리드먼
벤자민 H. 프리드먼은 세계 시온주의 음모에 가담한 유대인으로, 세계 지배를 위한 시온주의자들의 계획을 폭로했습니다. 프리드먼은 뉴욕시에서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였으며 한때 우드버리 비누 회사의 주요 소유주였습니다. 그는 1945년에 조직화된 유대인들과 결별하고, 남은 여생 동안 그동안 쌓은 막대한 재산을 미국과 세계에 대항하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폭로하는데 썼습니다.
프리드먼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미국에 대한 권력을 얻기 위한 유대인 조직과 유대인의 음모의 고위층 내부자였기 때문입니다. 프리드먼은 버나드 바룩, 새뮤얼 언터마이어,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즈벨트, 조셉 케네디, 존 F. 케네디, 그리고 그 시대의 많은 운동가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습니다. 1961년 워싱턴 D.C.의 윌라드 호텔에서 콘데 맥긴리(Conde McGinley)의 애국적 신문인 커먼 센스(Common Sense)를 대표하여 행한 연설에서 발췌한 다음에서, 프리드먼은 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어떻게 독일의 뒤통수를 쳤는지를 밝혔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미국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위협과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계획을 설명합니다.
“오늘 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다른 어떤 것에서도 결코 배울 수 없었던 것이며,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들과 이 나라와 기독교의 생존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의 혈압을 올리는 몇 가지 사실들을 말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될 것들을 말하기 위해 왔습니다: 해방, 자유,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살 수 있는 권리, 여러분이 약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심에 옳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약간의 권리에 대해서입니다.
우선, 1960년 8월 25일, 선거 직전, 현재 미국 대통령인 케네디 상원의원이 뉴욕에 가서 미국 시온주의 기구에게 연설을 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연설에서 그는, 가장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현재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세운 정권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미국의 군대를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 청년들이 그들의 집에서 끌어내져서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단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해외로 보내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독교 청년들은 지난 12년 동안 유엔이 통과시킨 15개의 결의안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총을 쏘라는 요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미군이 중동에 주둔하여 동유럽에서 이주해 온 ‘시온’주의자들에 의한 1948년 무장 봉기로 고향에서 쫓겨난 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귀환을 막기 위해 ‘시온’주의자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동맹군으로서 싸울 때, 그렇게 되면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것입니다.”
벤자민 프리드먼은 케네디 상원의원이 1960년 8월 25일 미국 시온주의 기구 앞에서 한 연설이 케네디의 정치적 쇼윈도 드레싱이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케네디는 매우 위험한 정치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자비한 정치인이었지만 애국심이 강한 미국인이기도 했습니다. 케네디의 연설은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필요한 강력한 시온주의자들의 재정 및 언론 이익에 호감을 얻기 위해 해야 한다고 느낀 연설이었습니다.
앤소니 흐뮤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 그 불필요한 전쟁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서로 맞물려 있는 세계적인 시온주의자들의 음모를 발견했습니다. 흐뮤라는 시온주의자들의 음모를 폭로하는 회보를 발행했습니다. 그는 1955년경 당시 상원의원 존 케네디와 많은 사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케네디는 시온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반 시온주의자였지만 기민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쌓기 위해 자신의 진정한 반 시온주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그가 미국 대통령의 고위직에 오르면 시온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해 뭔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시온주의자들과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케네디는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라고 압박했고, 그로 인해 그는 암살당했습니다.
케네디가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정권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을 파견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프리드먼이 1961년 윌라드 호텔에서 연설을 할 당시, 그는 케네디가 하고 있는 위험한 게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시온주의자들이 통제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관해서는 절대적으로 정확했습니다. 프리드먼은 1961년 윌라드 호텔 연설에서 그 사건들과 그 사건들이 미래에 미칠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시온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료 종교인들은 우리 ㅈㅂ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여기 이 시점에 다루기에는 너무나 많고 복잡합니다 – 그러나 저는 그 진술을 뒷받침하는 질문에 기꺼이 대답하겠습니다 – 시온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료 종교인들은 마치 그들이 이 나라의 절대 군주인 것처럼 이 미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은 ‘음, 그건 매우 광범위한 진술입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우리가 모두 잠든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도 포함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제 1 차 세계 대전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1914년 여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제 나이 또래 중에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그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한쪽에서 벌이고 있었고 다른 쪽에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터키가 있었습니다.
2년 안에 독일은 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명목상으로만 승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승리한 것입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독일 잠수함은 대서양에서 온 모든 호송대를 휩쓸었습니다. 영국은 병사들에게 탄약도 없이 일주일 분량의 식량을 공급받았고, 그 이후에는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솜므 강변의 베르됭 방어전에서 꽃다운 프랑스 젊은이들 600,000을 잃었습니다. 러시아 군대는 탈주했고, 장난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고, 더 이상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고, 짜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군은 무너졌습니다.
독일 땅에서는 단 한 발의 총성도 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의 적군도 국경을 넘어 독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독일은 영국에 평화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 협상된 평화를 제안했는데, 이는 법률가들이 현상 유지 전제(status quo ante-premise)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전쟁을 멈추고, 모든 것을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상태로 두자”는 뜻입니다. 1916년 여름, 영국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독일이 관대하게 제안한 이 협상된 평화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전쟁을 계속하여 완전히 패배하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1916 교착 상태-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동유럽의 시온주의자들을 대표하는 독일의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의 전시 내각으로 갔고, 그리고―이야기가 길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저는 제가 한 진술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들은 말했습니다: “여기 보세요. 당신은 아직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독일이 제안한 평화 협상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이 동맹국으로 들어온다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신선했고 젊었고 부자였습니다. 미국은 강력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게 “당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팔레스타인을 우리에게 약속한다면 우리는 미국을 당신들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끌어들이고, 당신들 편에서 당신들과 함께 싸울 것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거래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당신들의 동맹국으로서 이 전쟁에 참여시킬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를 물리친 후 당신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팔레스타인이다.” 이제 영국은 미국이 어떤 이유로든 일본을 아일랜드에 약속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팔레스타인을 누구에게나 약속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곳에 대해 아무런 연고나 이해관계나 권리도 전혀 없는 영국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대가로 시온주의자들에게 그 나라를 바친다는 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1916년 10월에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여기 계신 분들이 얼마나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거의 전적으로 친독일적이었던 미국이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했습니다.
저는 미국이 거의 전적으로 친독일적이었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곳의 신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통제되었고, 은행가들이 유대인들이었고, 이 나라의 모든 대중 매체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통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그들, 즉 유대인들은 친독일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중 다수가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친독일적이었고, 또한 독일이 차르를 치는 것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차르를 좋아하지 않았고, 러시아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쿤 로브(Kuhn Loeb)와 미국의 다른 대형 은행들과 같은 독일계 유대인 은행가들은 프랑스나 영국에 단 1달러도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옆으로 비켜서서,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와 결탁해 있는 한 단 한 푼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에는 돈을 쏟아 부었고, 독일과 함께 러시아에 맞서 싸웠으며, 차르 정권을 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랬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을 때, 영국으로 가서 이 거래를 한 것입니다. 그 당시 신호등이 빨간색에서 녹색으로 바뀌는 것처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신문들이 모두 친독일적이었고, 독일이 상업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영국과 싸우고 있다는 어려움을 국민들에게 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독일인들은 쓸모가 없어졌고 악당들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은 훈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십자 간호사들에게 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기들의 손을 자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드로 윌슨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밸포어 선언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런던의 시온주의자들은 미국에 전보를 보내 브랜다이스 판사에게 “윌슨 대통령을 위해 일하러 가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영국에서 얻고 있다. 이제 당신은 윌슨 대통령을 위해 일하고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여라.” 그렇게 해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전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이 방 대신 달에 있어야 하는 것만큼이나 그 전쟁에 참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전쟁이 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겁니다. 미국은 단지 세계의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을 손에 넣기 위해 벌인 그 전쟁에 빨려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미국 국민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후,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우리는 협정의 일부를 이행했습니다. 당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협상을 지키고 팔레스타인을 우리에게 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무언가를 서면으로 작성합시다.” 그들은 전쟁이 1년 더 지속될지 10년 더 지속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수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영수증은 편지 형태를 취했는데, 그 편지는 세상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매우 비밀스러운 언어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밸포어 선언이라고 불린 것이었습니다.
밸포어 선언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시온주의자들이 합의한 것을 지불하겠다는 영국의 약속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도 많이 듣는 이 위대한 밸포어 선언은 3달러 지폐만큼이나 가짜입니다. 이점을 이보다 더 강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베르사유-
거기가 모든 문제가 시작된 곳입니다. 미국이 참전했고, 독일을 짓밟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잖아요. 전쟁이 끝나고 독일이 1919년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갔을 때, 버나드 바룩이 이끄는 유대인 대표단 117명이 파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 평화 회담에 참석한 유대인들이 독일을 분할하고 유럽 영토의 특정 부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모든 나라들에게 유럽을 나누어 줄 때, “우리에게는 팔레스타인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독일인들이 알기에 처음으로 이 밸포어 선언을 작성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그때서야 처음으로 “아, 이게 바로 게임이었구나! 그래서 미국이 참전했던 거로구나!”하고 알아차렸습니다. 독일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패배했고,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을 원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팔레스타인을 얻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독일에게 쏟아진 엄청난 배상을 겪어야만 했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독일인들이 유대인 활동을 발견하다-
그것은 우리를 또 다른 매우 흥미로운 점으로 이끕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독일인들은 당연히 분개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독일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미스터 라테나우가 있었는데, 그는 그 나라의 버나드 바룩보다 산업과 금융계에서 100배는 더 중요한 자였습니다. 미스터 발린(Balin)이 있었는데, 그는 두 개의 큰 증기선 노선인 북독일 로이드 노선(North German Lloyd’s Lines)과 함부르크-아메리칸 라인(Hamburg-American Lines)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은행가였던 미스터 블레이흐뢰더(Bleichroder)가 있었습니다. 함부르크에 바르부르크 가문이 있었는데,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상업 은행가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독일에서 매우 잘 지내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와, 그건 굉장한 매각이네.”라고 느꼈습니다.
미국이 소련과 전쟁 중이라고 가정해보는 가상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는 매각이었습니다. 미국이 이기고 있었고 소련에게 “자, 그만둡시다. 우리는 당신에게 평화 조건을 제안합니다. 모든 걸 잊어버립시다.” 했는데, 갑자기 붉은 중국이 소련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그들을 전쟁에 끌어들인 것이 미국의 패배를 가져왔으며, 그것이 인간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배상이 뒤따르는 참담한 패배였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패배 이후, 만약 우리가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는 충성스러운 시민들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에 있는 중국 시민들이 우리를 소련에 팔아넘기고 있었고, 그들을 통해 붉은 중국이 우리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미국에서 우리는 중국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는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감히 어떤 거리에서도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돌볼 편리한 가로등 기둥이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 상상해 보십시오.
독일인들은 이 유대인들에 대해 그렇게 느꼈습니다. 1905년 러시아의 첫 번째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유대인들이 러시아를 탈출해야 했을 때, 그들은 모두 독일로 갔고 독일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그들은 매우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소위 “유대인 연방”으로 원한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아무 이유도 없이 독일을 강 아래로 팔아넘긴 겁니다.
1919년, 1920년, 1921년, 1922년, 1923년에 나훔 소콜로(Nahum Sokolow)와 오늘날 시온주의와 관련하여 여러분이 읽은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과 위대한 이름들은 그들의 모든 신문들에서―그리고 언론은 그들의 진술로 가득 찼습니다―독일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은 그 큰 패배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유대인들의 중재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유대인들 자신도 그 점을 인정했습니다. 1919년 독일인들이 발견한 것은 유대인의 피가 담긴 맥주가 코카콜라나 뮌슈너 맥주보다 더 맛있다거나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종교적 신념 때문에 그들을 적대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정치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종교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유대인들이 집에 가서 블라인드를 내리고 “쉐마 이스로엘”이라고 말하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는 미국에서보다 더 그런 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독일에서 발전한 이러한 감정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독일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참패에 대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 * *
그 당시 독일인들은 8천만에서 9천만 명이었고 유대인들은 46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독일 인구의 1퍼센트 중 약 절반[0.5%]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든 언론을 통제했고,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했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화가 평가절하되었을 때 값싼 돈을 가지고 들어와 거의 모든 것을 사들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감추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독일을 팔아먹었다는 사실과 독일인들이 그것 때문에 분개했다는 사실을 세상이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유대인들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그들을 차별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피했습니다. 우리를 적에게 팔아넘기고 패배를 안겨준 이 나라의 모든 중국인, 흑인, 카톨릭 신자, 또는 그런 누구라도 피하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1933년: 유대인들이 독일에 무역 전쟁을 선포하다-
얼마 후,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에서 모임을 소집했습니다. 1933년 7월, 세계 각국의 유대인들이 이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독일에 “당신들은 히틀러를 해고하고, 공산주의자이든 아니든 모든 유대인들을 예전의 위치로 되돌려 놓는다. 당신은 우리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없다. 우리 세상의 유대인들은 너희에게 최후통첩을 보내고 있는 거다.” 독일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1933년, 독일이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 유대인 회의에 항복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 회의는 해산되었고, 미국 대표단의 우두머리이자 전체 회의의 의장이었던 미스터 새뮤얼 언터마이어가 증기선으로 미국에 도착해 콜럼비아 방송 시스템의 스튜디오로 가서 미국 전역에 라디오 방송을 했습니다. “세계의 유대인들은 지금 독일에 대항하여 신성한 전쟁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지금 독일에 대항하는 신성한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굶겨 항복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전 세계적인 보이콧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수출 사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의 식량 공급의 3분의 2를 수입해야 했고, 수출한 수익금으로만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이 수출을 할 수 없다면 독일 인구의 3분의 2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먹일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1933년 8월 7일자 뉴욕 타임즈에 실린 이 선언문에서 새뮤얼 언터마이어는 대담하게 “이 경제적 보이콧은 우리의 자기 방어 수단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가부흥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에서 이 법(경제적 보이콧)의 사용을 옹호해 왔는데, 여러분 중 일부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뉴딜 정책이 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보이콧을 당해야 했고, 당시 대법원은 이를 위헌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유대인들은 독일에 대한 불매 운동을 선언했고, 그 불매 운동은 너무나 효과적이어서 세계 어느 상점에서도 “Made in Germany”라는 문구가 적힌 물건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울워스 컴퍼니(Woolworth Company)의 한 임원은 수백만 달러 상당의 그릇과 접시를 강에 버려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들어와서 “독일제(Made in Germany)”라고 적힌 접시를 발견하면 불매 운동을 벌이고, “히틀러”, “살인자” 등의 팻말을 들고 피켓 시위를 벌이는 등 남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농성 시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R. H. 메이시 체인점의 한 상점에서 슈트라우스라는 유대인 가족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한 여성이 켐니츠(Chemnitz)에서 온 “made in Germany”라고 적힌 스타킹을 발견했습니다. 글쎄, 그것들은 면 스타킹이었고, 여자들이 면 스타킹 신은 것을 못본지가 꽤 되었기 때문에 20여 년 동안은 팔리지 않은 채 있어왔을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메이시 백화점이 보이콧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살인자”, “히틀러주의자” 등의 팻말을 들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때까지도 독일에서는 유대인들의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고통도, 굶주림도, 살인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독일인들은 “이 사람들이 뭔데 우리에 대한 불매 운동을 선언하고 우리 국민들을 모두 직장에서 쫓아내고 산업을 멈추게 하는 거지? 도대체 누구라고 우리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그들은 당연히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유대인 소유의 상점들에 스와스티카를 그렸습니다. 왜 독일인들이 그들의 총리나 수상이 누가 될 것인지를 지시하고, 독일제품 불매 운동으로 독일인들을 굶어죽게 할 세계 유대인들의 상점 주인들에게 돈을 주어야 합니까? 글쎄, 그것은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깨진 유리의 밤과 재무장-
보이콧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1938년 폴란드 출신의 젊은 유대인이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 들어가 독일 관리에게 총을 쏜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독일인들은 독일에 있는 유대인들을 거칠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창문을 깨고 길거리 싸움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저는 “반유대주의”라는 단어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여전히 당신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독일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과 전 세계적인 보이콧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도 지게 되었는데, 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유대인들과 독일은 전쟁에서 어느 쪽이 살아남을지 맞붙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는 독일에서 살았고, 독일인들은 유럽이 기독교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결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가능하다면 기독교를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재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 11월 미국은 소련을 승인했습니다. 소련은 매우 강력해졌고, 독일은 “우리가 강하지 않으면 곧 우리의 차례가 올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미국에 사는 우리들이 “우리가 강하지 않으면 우리의 차례는 곧 올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미국 ㅈㅂ는 국방비로 830억 달러에서 84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습니다. 누구에 대한 방어입니까? 러시아를 장악한 40,000명의 모스크바에 있던 소수의 유대인들이 사악한 방법들로 세계의 다른 많은 나라들을 장악했습니다.
-제3차 세계대전-
* * *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까? 핵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면 인류는 종말을 고합니다. 그러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막이 오르면 일어날 것입니다. 1막은 제1차 세계대전, 2막은 제2차 세계대전, 3막은 제3차 세계대전이 됩니다. 세계의 유대인들, 시온주의자들, 그리고 도처에 있는 그들의 동료 종교인들은 팔레스타인을 그들의 세계ㅈㅂ를 위한 발판으로 영구히 유지하도록 돕기 위해 다시 미국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큼이나 사실입니다. 저 혼자만 읽은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읽었으며 이 책은 전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의 시온주의 이중 거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이 구한 생명이 당신 아들의 생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들이 오늘 밤 그 전쟁터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은 1916년 런던에서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의 전쟁 내각과 거래를 하여 당신의 아들들을 유럽의 전쟁터로 보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때 알고 계셨나요? 미국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알았습니까? 윌슨 대통령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우스 대령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내부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었냐구요?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1912년 윌슨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선거 운동에서 헨리 모겐소 시니어와 연락하고 있었고, 그곳의 사무실 주변에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저는 재정 위원회 위원장인 헨리 모겐소 시니어에게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었으며, 그와 회계 책임자인 롤로 웰스 사이의 연락 담당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윌슨 대통령과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 회의에 참석했고, 그들이 윌슨 대통령의 머리에 누진소득세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주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브랜다이스 대법관과 윌슨 대통령은 이 손의 두 손가락만큼이나 가까웠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무능한 갓난아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 모두가 잠든 사이에 우리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시켰습니다. 그들은 우리 아이들을 저쪽으로 보내 학살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그들의 “연방”으로 가질 수 있도록이요. 그들은 여러분을 너무 많이 속여서 여러분은 속이는 것이 오고 있는 건지 가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블러디 시온에서 발췌
시온주의자들은 대중을 선전하고 노예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모든 종류의 적그리스도 철학을 만들어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이 선전하는 주요 사탄 운동들 중 하나는 공산주의입니다. 의정서 제2의정서의 제3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윈주의(진화론),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니체주의(사회주의)를 위해 준비한 성공들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라. 어쨌든, 우리 유대인들에게는, 이 지시들이 고임[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을 가축/동물/짐승으로 보고 일컫는 말]의 정신에 얼마나 파괴적인 중요성을 지녔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랍비 S. 와이즈는 1935년 5월 5일자 「어메리칸 회보」(American Bulletin)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유대교라고 부른다”고 말하였습니다. 1918년 4월 4일자 「유대인 연대기」(The Jewish Chronicle)는 “볼셰비즘의 이상은 유대교의 가장 훌륭한 이상과 일치한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사실상 탈무드에서 생겨나 실천에 옮겨진 종교 철학이라는 사실은 무지한 이방인들에게 숨겨져 왔습니다. 1999년에 국립 기록 보관소가 공개한 1971년 백악관 기록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이렇게 밝혔습니다: “공산주의 음모에 가담한 비유대인은 챔버스와 히스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우리들에게 지옥을 일으켰습니다.” 탈무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노력[음모]을 폭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음으로써 공산주의 신세계질서 수립에 자신들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온’주의가 ‘유대’인들의 조국을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이 조국을 세우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려는 훨씬 더 원대한 계획을 위한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시온주의는 탈무드의 산물이며, 탈무드는 공산주의입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은 유대인들이 탈무드 교리에 따라 계획하고 실행한 것입니다.
똑똑히 아십시오. 그 공산주의자들은 서두에서 그들의 목표가 세계 지배라고 말했습니다.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세계대회는 “국제 부르주아지의 타도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설을 위해 무력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성명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시온주의의 외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시온주의자들이 세계에 선전포고를 하고 승리 후 철권통치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탈무드 유대교입니다. 외래적 공산주의는 스스로를 무신론적 정치 운동으로 묘사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곳마다 기독교 교회들이 박해를 받은 것이 그 점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유대교 종교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의 진정한 본질은 유대교 회당이 공산주의 국가의 기독교 교회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공산주의는 유대교가 하나님과 인류에 대항하는 사탄의 음모임을 드러냅니다.
유대인 학자 헨리 매코우 박사는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장악하고 종교를 말살하려 했을 때, 기독교 교회가 파괴되고 기독교 성직자들이 살해되거나 투옥되었지만, 유대인 회당과 랍비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공산주의가 모든 종교에 적대적인 정치 운동이었다면, 유대교에 통행증이 주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매코우는 그 문제를 조사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미국의 역사학자 에드윈 스쿤메이커(Edwin Schoonmaker)의 책에서 그 답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이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된 지 15년이 지났을 때, ‘미국 히브리인(American Hebrew)’의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필자가 몇 주 전에 러시아에 있는 동안 확보할 수 있었던 정보에 따르면, 단 하나의 유대인 회당도 수백, 어쩌면 수천 개의 그리스 카톨릭 교회들이 철거되었던 것처럼 철거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와 다른 대도시들에서는 기독교 교회들이 파괴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언제든지] ㅈㅂ가 큰 건물을 지을 위치를 필요로 할 때마다.’ (American Hebrew, 1932년 11월 18일, 12면) ‘인민의 아편’으로서의 종교를 파괴하는 혁명을 주도한 배교한 유대인들이 러시아의 회당들만은 어떻게든 살려두었다.” (“민주주의와 세계 지배”, 1939, p.21l)
공산주의자들이 하나님과 종교를 그토록 증오했다면, 왜 회당들도 파괴하지 않았는가? 기독교와 유대교가 같은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종교가 종교가 될 수 있는가? 유대교는 그 회원들이 사실 공산주의로 표현되는 숨겨진 의도를 알지 못하는 프리메이슨같은 비밀 결사체인가? 많은 독실한 유대인들이 실제로 반공산주의자이기도 했지만, 스쿤메이커의 정보는 탈무드 유대교와 이교 사탄 공산주의 사이에 친화성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V.I. 레닌의 외할아버지 이스라엘 블랭크는 유태인이었습니다. 하바드 대학의 연구원 웨인 맥과이어는 이렇게 썼습니다: “레닌은 이스라엘의 귀환법의 기준에 따라 유대인이었다: 그는 유대인 조부모를 가졌다.” 레닌은 명백히 자신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리한 러시아인은 거의 항상 유대인이거나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다.” 소련 적군의 최고사령관인 레온 브론스타인(트로츠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대인이었습니다. 1918-19년 볼셰비키 정권의 주요 공모자 556명 중 러시아인 17명, 우크라이나인 2명, 아르메니아인 11명, 라트비아인 35명, 독일인 15명, 헝가리인 1명, 조지아인 10명, 폴란드인 3명, 핀란드인 3명, 체코인 1명, 카림인 1명, 유대인 457명이었습니다. 로버트 윌튼(Robert Wilton)이 그의 저서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날들(The Last Days of the Romanovs)’에서 지적했듯이, 공산주의 혁명은 러시아인들의 반란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비밀 침략이었습니다. 1983년 현재 소련 수상은 유대인(안드로포프)이었고 정치국(소련 지배 파벌) 위원들 25명 중 23명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소련군과 경찰의 고위직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로버트 윌튼(Robert Wilto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독일군은 레닌의 유대인 무리를 러시아로 보냈을 때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독일군은 유대인들을 멸망의 대행자로 선택했다. 왜?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러시아인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멸망은 혁명적이든 재정적이든 사업상의 모든 것을 가로막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볼셰비즘에 대한 전체 기록은 외세 침략의 흔적으로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유대인 스베르들로프(독일의 유급 요원으로 러시아에 왔던)가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유대인 골로셰킨, 시로몰로토프, 사파로프, 보이코프, 유코프스키가 자행한 차르의 살해는 러시아 인민들의 소행이 아니라 이 적대적인 침략자들의 소행이었다.
잭 모어 대령은 “탈무드의 바리새인들이 겪은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공산주의가 탈무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이 탈무드 유대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음모였다는 직접적이고 정황적인 증거는 압도적입니다. 유대인들의 공산주의 혁명 통제를 가리키는 정황 증거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후 그들이 통과시킨 첫 번째 법이 반유대주의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 건물이 마구간, 도살장, 무도장으로 바뀌는 동안, 유대인 회당들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기독교 목사들은 목회자직에서 물러나 도로와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유대교 랍비들은 교직의 의무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약 200,000명의 (기독교) 교직자들, 많은 사람들이 구소련의 약 60년간의 공산주의 통치 기간 동안 죽임을 당했다고, 러시아의 한 위원회는 월요일(1995년 11월 27일)에 보고했다. 1922년에서 1980년 사이에 40,000개의 교회들이 파괴되었다.”
역사학자 마이클 호프만 2세는 피에 굶주린 공산주의 선전 뒤에 숨겨진 의미를 폭로했습니다:
레닌은 “우리는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를 말살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의 범죄 파트너인 아펠바움(지노비예프)은 “혁명의 이해관계는 부르주아 계급의 물리적 절멸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 부르주아지는 누구인가? 물론 유대인들은 아니다. 트로츠키는 1937년 뉴욕의 유대인 신문 데일리 포워드(Daily Forward)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다: “썩은 부르주아 사회가 오래 살면 살수록, 반유대주의는 도처에서 점점 더 날뛰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Bourgeoisie)는 이방인에 대한 볼셰비키의 암호어였다.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통과된 첫 번째 법은 반유대주의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한 것이었다. (이즈베스티아, 1918년 7월 27일).
* * *
유대인 볼셰비키는 정치를 ‘이방인들 해충’ 방제의 한 분야로 간주했다. 기독교인들, 특히 농민 “부르주아지”에 대한 증오가 그들의 주된 동기였다. 1918년 여름 레닌의 공격과 1921년 강제 기아를 시작으로 수많은 해충인 러시아의 기독교 농민들에 대한 체계적인 파괴는 서구 역사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다.
헨리 매코우는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의 잔혹성은 탈무드 유대인들에 의해 영감을 받아 주도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매코우는 체카(후에 OGPU, 그 다음에는 NKVD, 그리고 마지막으로 KGB로 이름이 바뀜)가 적어도 2천만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학살의 주된 초점은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이었고 특히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슬라바 카타미제의 말에 따르면, “교회는 시초부터 볼셰비키의 적대 행위의 표적이 되었다.”
매코우는 유대인 작가 세버 플로커(Sever Plocker)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는 잔혹한 체카가 주로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운영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체카는 레닌과 트로츠키에 의해 힘을 얻었는데, 그들은 일루미나티 유대인들이었고 일루미나티 유대인 은행가들의 자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고, 그들의 손에 영원히 피를 묻히고 있다”고 플로커는 썼습니다. “우리는 현대의 가장 위대한 살인자들 중 여럿이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플로커는 피에 굶주린 유대인들의 예로, 수백만 명의 러시아인들 학살을 감독했던 겐리크 야고다(Genrikh Yagoda)를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학생은 20세기 최고의 유대인 학살자이자 GPU의 부사령관이자 NKVD의 창설자이자 사령관인 “겐리크 야고다”라는 이름을 듣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마친다. 야고다는 스탈린의 집단화 명령을 성실히 이행했고, 적어도 1000만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의 유대인 대표들은 강제노동수용소 제도를 설립하고 관리했다.
모세 모르드개 마르크스 레비(별칭 칼 마르크스)는 유대인이자 사탄주의자였으며 일루미나티의 한 분파인 “의인 연맹”의 회원이었습니다. 1847년, 마르크스는 일루미나티로부터 세계 지배를 위한 그들의 계획의 개요인 공산당 선언을 작성하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의정서 제3의정서 제7항은 이방인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돕는 속임수들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에게 우리의 투쟁 세력 – 사회주의자, 무ㅈㅂ주의자, 공산주의자 – 의 대열에 합류할 것을 제안할 때 이 억압으로부터 노동자의 구세주라고 주장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 우리는 항상 우리 사회 메이슨리의 (인류 전체의 결속에 대한) 형제적 규칙에 따라 그들을 지지한다. 노동자들의 노동을 법으로 누리는 귀족들은 노동자들이 잘 먹고, 건강하고, 튼튼한지 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정반대의 것, 즉 고임을 죽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
탈무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폭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음으로써 새로운 공산주의 세계 질서 수립에 자신들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반유대주의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혀 셈족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셈족은 노아의 장남인 셈의 후손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동유럽에서 유대교라고 부르는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지만, 사실은 바빌로니안 탈무드입니다. 나중에 이 바빌로니아 형태의 유대교로 개종한 유럽인들은 아슈케나지 또는 카자르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전에 유대인이었던 벤자민 H. 프리드먼 박사의 말에 따르면, 카자르족은 남근 숭배와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가 혼합된 종교적 숭배를 행하는 이교 국가였습니다. 7세기에 그들의 왕 불칸은 현재 대부분이 유대교라고 부르고 있는 종교인 탈무드를 선택해 국교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카자르 유대인들은 “이디쉬(Yiddish)”라고 불립니다.
이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어느 나라에도 충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전 세계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탈무드 교도들의 사악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1879년 바뤼흐 레비가 칼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봅시다:
유대 민족 전체가 그 자체의 메시아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종족들의 해체에 의해서, 국경의 폐지에 의해서, 군주제의 소멸에 의해서, 그리고 유대인들이 어디서나 시민권의 특권을 행사하게 될 세계 공화국의 설립에 의해서 세계 지배권을 획득할 것이다. 이 신세계질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모든 지도자들을 부양할 것이다. 세계 공화국을 형성하는 여러 민족들의 ㅈㅂ들은 어려움 없이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 통치자들은 사유 재산을 폐지할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곳에서 국가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메시아[적그리스도]의 때가 오면 유대인들이 온 세상의 모든 재산을 손에 쥐게 될 것이라는 탈무드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가 아랍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탈무드 유대인들의 작품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스라엘로 이주한 미국 아슈케나지 유대인 잭 번스틴은 이스라엘의 이중성을 목격한 후 혐오감을 느끼며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세파르딕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 원주민 유대인들이 현대 이스라엘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 무슬림들과 함께 이스라엘 사회의 최하층에 있는 2등 시민입니다. 그의 저서 ‘인종차별주의 마르크스주의 이스라엘 안에서의 미국 유대인의 삶'(The Life of an American Jew in Racist Marxist Israel)은 이스라엘의 마키아벨리적 전략을 설명합니다.
번스틴은 아랍 국가들에 대한 공산주의 러시아의 지원이 유대인들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마키아벨리적 계획의 일부가 공산주의 러시아가 아랍인들에게 군사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을 파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원조를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1949년 이래 이스라엘과 공산주의 러시아 사이에는 정보 공유가 자유로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번스틴은 텔아비브 북부의 공산당 서기장-재무장관의 입에서 직접 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번스틴은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민주주의 국가로 소개하지만, 사실 이스라엘은 뼛속까지 공산주의 국가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시온’주의와 ‘공산주의’는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공산주의는 이스라엘의 유대인 키부츠에서 발견됩니다.
마이클 콜린스 파이퍼는 그의 저서 ‘최후의 심판’에서 이스라엘의 공산주의 관계는 구소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핵무기와 다른 군사 무기의 개발에 있어서 비밀리에 협력해온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미국과 다른 서방 기술들이 공산주의 중국으로 흘러가는 주요 통로들 중 하나로 언급되어 왔습니다.
ㅋㅂㄷ19 사기극과 안티파,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M) 운동은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를 재설정하기 위해 미리 계획한 전복 전략
캐롤 퀴글리는 1966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비극과 희망‘에서 비밀을 누설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금융자본주의의 힘은 또 다른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각 나라의 정치 체제와 세계 경제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사적 소유의 세계 금융 통제 시스템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체제는 세계의 중앙은행들이 공동으로 행동하는 봉건주의적 방식으로, 빈번한 사적 회의들과 회의에서 도출된 비밀 협정들에 의해 통제되게 되어 있다. 이 체제의 정점은 스위스 바젤에 있는 국제결제은행인데, 이 은행은 그 자체로 사기업인 세계 중앙은행들이 소유하고 통제하는 민간은행이다. 영국은행의 몬태규 노먼,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벤자민 스트롱, 프랑스은행의 샤를 리스트, 독일은행의 얄마르 샤흐트와 같은 사람들의 손에 있는 각 중앙은행들은 국고를 통제하고, 외환을 조작하고, 국가들의 경제 활동 수준에 영향을 미치고, 사업 세계에서 경제적 보상을 통해 협력적인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ㅈㅂ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 비극과 희망, 324쪽.
이벤트 201은 공개 계획이 문서화된 회의들 중 하나였지만, 그 시점에는 이미 비밀 계약이 체결된 상태였습니다. 공모자들은 ㅋㅂㄷ19 공포가 진정한 의학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팬데믹 계획을 면밀히 검토하도록 하는 것을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ㅋㅂㄷ19 사기극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첨단 기술을 통해 완전히 예속시키는 봉건적 은행 모델 하에서 경제를 재설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경제를 붕괴시킨 국제 유대인 은행가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쓴 연막일 뿐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강력하고 뻔뻔스러워서 여러분이 ㅋㅂㄷ-19 전염병이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ㅋㅂㄷ-19는 중앙 은행가들에 의한 금융 강도의 연막입니다.
에드워드 헨드리